제27대 총장 미나토 나가히로(湊 長博)
교토대학 여러 학부에서 학사 과정을 수료하고 오늘 떳떳이 졸업식을 맞은 2,770명 여러분, 대단히 축하드립니다. 이 자리에 함께해 주신 야마기와(山極) 전 총장님, 참석하신 이사, 관계 부국장을 비롯한 교토대학 교직원 일동 및 재학생을 대표해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아울러 오늘 졸업하는 날까지 여러분을 지원하며 격려해 주신 가족 및 친척 여러분도 정녕 기쁘시리라 생각합니다. 졸업생 여러분을 대신해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축하드립니다. 1900년에 제1회 졸업식을 치른 이래 121년에 걸쳐 교토대학이 배출한 졸업생은 여러분을 포함해 217,226명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대학 생활 마지막 해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인한 팬데믹 사태라는 전에 없던 재난 속에서 혹독한 제약을 받으며 지내셨습니다. 작년까지 전혀 예상조차 못했던 경험을 하셨을 겁니다. 물론 여러분뿐만 아니라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 학생들도 마찬가지로 괴로운 경험을 겪었습니다. 캠퍼스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도 없고 강의나 실습은 대부분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되었으며 클럽이나 동아리 활동은 물론 친구들과의 일상적인 대화도 직접 마주하고는 자유롭게 즐길 수 없는, 정말 힘든 나날이었을 줄로 압니다. 특히 혼자서 자취 생활을 하시던 여러분은 매우 불안한 마음이 드셨을 겁니다. 대학 차원에서도 이 예기치 못한 사태 속에서 여러분을 지원하기 위해 여러 조치를 취했습니다. 또 때로는 상당히 어려운 부탁을 드려야 하기도 했는데, 여러분은 정말 잘 견뎌내 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그런 한편 이런 비정상적인 사태 속에서 여러분 스스로가 각자의 학문 영역과 관련해 여러 모로 생각하게 되는 일도 많지 않았을까 합니다. 여러분은 자연과학이나 인문사회과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과학의 기초지식을 습득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번 팬데믹으로 이 세상에는 기존 과학과 기술만으로는 쉽게 해결에 이르지 않는 커다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체감하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이는 팬데믹뿐 아니라 현대 사회가 직면한 지구 규모의 인류의 제반 문제, 예를 들면 지구의 기후 변화, 환경 파괴와 대규모 자연 재해 등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과학과 기술의 진보야말로 인류와 사회의 발전을 낳는 원동력이라고 믿어 왔습니다. 물론 그런 근대화론 자체는 틀리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인류 전체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지구 규모의 복잡한 제반 문제는 반드시 과학과 기술 발전만으로 자동으로 해결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더욱 명백해진 게 아닐까요? 이런 상황에서는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판단해서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더없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2차대전 전에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郎) 박사님을 중심으로 한 교토학파가 제창한 ‘스스로 생각하는(selbstdenken/젤프스트덴컨) 철학’을 다시 한 번 돌아볼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이는 교토대학에 살아 숨쉬는 비판적 정신의 전통으로도 이어집니다.
정보화 시대에 들어선 지 오래된 지금 우리 주위에는 인터넷을 비롯한 다양한 매체를 통해 나날이 방대한 정보가 난무하게 되어 이제는 정보 과잉의 시대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정보 교신도 SNS를 통해 글로벌하게, 그리고 즉각적으로 가능해졌습니다. 자칫하면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이 방대한 양의 정보에 휘둘리고 농락당해 스스로의 모습을 잃게 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여러분께 ‘스스로 생각하기(selbstdenken/젤프스트덴컨)’의 전제가 되는 비판적 사고, 혹은 비판적 정신에 대해 잠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비판적’이란 영어로 critical을 의미합니다. 가지고 계신 영어사전을 보면 이는 difficult to deal with because a small mistake could make very bad things happen, 즉 ‘작은 실수로 중대한 사태를 일으킬 수 있어 취급이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한자로도 비판의 ‘비(批)’는 ‘사실을 대조하는 것’, ‘판(判)’은 ‘구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매사를 주어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을 파악해 스스로의 사고 과정 검증을 통해 판단하고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의 중요성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비판’은 흔히 사용되듯 다른 자를 비난, 공격, 또는 논파한다는 부정적 의미가 원래는 아닙니다. 의사결정 시에 분석에 필요한 데이터가 충분히 갖추어졌는지, 사고와 판단의 전제는 올바른지, 그 과정은 논리적인지, 호불호 등의 자의적 감정이나 인습 등 편향이 작용하지는 않았는지 등을 스스로 신중하게 검증하는 것입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반사적, 경직적, 독단적으로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독일 철학자 Hans-Georg Gadamer는 논의할 때 이런 충분한 사색을 거쳐 결론에 이르렀더라도 여전히 ‘그래도 상대방이 옳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저는 현대와 같은 정보 과잉 시대야말로 이런 냉정한 비판적 사고와 정신의 관용을 발휘해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해질 거라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거의 1년 내내 온라인 수업이라는 것을 경험하신 아마도 첫 학생들일 겁니다. 이는 대부분의 교수들도 마찬가지여서, 이른바 암중모색하는 상태에서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컴퓨터나 소프트웨어가 진보하면서 적어도 정보, 더 나아가서는 지식의 전달이라는 의미에서도 온라인 수업은 나름대로 그 기능을 수행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대면 수업보다 더 효과적인 경우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런 한편 그때까지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어서 신경도 쓰지 않던 사람과 사람 간의 직접적 커뮤니케이션 속에 실제로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습니다. 잃고 나서야 그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 중에는 신체적으로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는 데서 오는 공감, 혹은 감정 이입, 즉 다른 사람을 헤아리는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고감도 마이크와 카메라를 사용해 청각과 시각에만 의존하는 커뮤니케이션은 정보 전달이나 데이터 교환 면에서는 지극히 효율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보통 공간과 시간을 촉각적으로 공유하면서 오감이라 불리는 모든 감각을 이용해 무의식 중에 그 자리의 모든 정보를 감지하고 이를 종합해 대화적 커뮤니케이션을 수행합니다. 이것이 ‘그 자리의 분위기와 뉘앙스를 캐치’하거나 ‘상대의 심경을 헤아리는’ 등의 감정 이입을 낳는 게 아닐까요? 틀림없이 여러분은 이번 경험을 헛되이 하지 않고 지금까지 충분히 의식하지 않았던 커뮤니케이션 시 감정 이입의 중요성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이를 계기 삼아 사람과 사람 간의 섬세하고 풍부한 관계성을 지금까지 이상으로 소중히 여겨 주시길 바랍니다.
오늘 교토대학 학사 과정을 수료하신 여러분은 앞으로 더욱 고도의 연구 세계로, 혹은 드디어 실제 사회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100년 이상 전에 캐나다의 Lucy Maud Montgomery 여사가 집필한 ‘빨간 머리 앤’이라는 소설 시리즈가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힌 아동 문학이라 일컬어지는 소설로 여러분 중에는 어릴 때 읽은 분도 계시겠지만, 저는 어린이보다 오히려 현대의 어른들이야말로 읽어야 할 책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여러분은 꼭 원서를 영어로 읽어 보셨으면 합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주인공 앤 셜리의 어린 시절을 그린 부분인데, 앤이 바로 지금 여러분처럼 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선생님이 된 시기를 쓴 제38장 ‘길모퉁이: The Bend in the Road’ 속에 "나는 길모퉁이를 참 좋아한다. 다음 모퉁이를 돌면 어떤 풍경일지, 대체 어떤 사람과 만날지, 어떤 생각지 못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된다”.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이 장편 소설 밑바탕에 일관되게 깔려 있는 것은 인생과 자연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과 한없이 밝은 낙관주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주인공의 자기형성 과정을 그리는 교양 소설, 문자 그대로 Bildungsroman/빌둥스로만의 걸작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여러 분야에서 과학의 기초적 지식과 소양을 익혀 오셨지만, 앞으로는 이를 기초 삼아 드디어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더 심화된 연구의 길이든 새로운 실제 사회 생활이든, 저는 여러분이 건전한 비판적 정신, 타자에 대한 섬세한 공감 능력인 감정 이입, 그리고 앤 셜리 같은 한없는 밝은 낙관주의를 겸비한, 건전한 시민(citizen)으로서 힘차게 날갯짓할 것을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되도록 젊을 때 해외 생활을 경험해 보시길 강력하게 권해 드리고자 합니다. 저 자신도 20대 후반을 미국 연구실에서 지내면서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모여든 같은 세대 젊은이들과 절차탁마하는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 경험이 그때부터 40년이 지난 현재에 이르기까지 제 인생의 행보와 사고 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모쪼록 교양 있는 새로운 지구 시민으로서 스스로의 세계를 개척해 나가시길 진심으로 기원하며 총장 축사를 갈음하고자 합니다.
다시 한 번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